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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책 리뷰

어린이 단편 동화 추천, 여우의 창

by 바람따라 세상 곳곳 2020.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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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 나오코 지음

  • 작가소개

아와 나오코는 194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일본 여자대학에서 문예평론가 야마무로 시즈에게 배우며 아동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여우의 창', '새' 같은 작품이 일본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현실과 환상이 신비롭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판타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화작가 중 한 사람으로 1993년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 '머나먼 들장미 마을', '하얀 앵무새의 숲', '손수건 위의 꽃밭' 등이 있다. 

 

 

  • 여우의 창

아와 나오코는 판타지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단편 '여우의 창'에서도 판타지 세계가 그려진다. 흥미롭지만 애잔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세계에 나도 모르게 감동에 젖는다. 그만큼 여운이 깊다. 

 

여우의 창이란 무얼 의미할까. 결국 마음의 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슴 깊은 곳에 슬픔이 고여있는 두 인물이 만나 소중한 사람을 곁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을 공유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아픈 기억을 묻어두기 보다 진심으로 사랑했고, 함께 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좀 더 따뜻한 기억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여우의 창 


언젠가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어요. 산 속 오두막으로 가는 길이었죠. 늘 다니던 길이었어요.
총을 어깨에 메고 멍하니 걷고 있었어요. 예전에 내가 아주 좋아했던 여자애를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산길을 돌았을 때 하늘이 갑자기 눈이 부시게 빛났어요.
마치 깨끗하게 닦은 파란 창문 같기도 하고. 땅도 웬지 옅은 파란색인 듯하구요.
!”
난 우뚝 멈췄어요. 눈을 두어 번이나 깜박였어요.
늘 다니던 삼나무숲이 아니라 넓게 펼쳐진 들판인 거예요.
게다가 한쪽에는 파란 꽃이 잔뜩 핀 도라지밭이었어요.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지요. 어쩌다가 이런 데로 오게 됐을까? 이런 도라지밭이 이 산에 있었나!
빨리 가야지.’
나는 혼자 중얼거렸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웬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거든요.
시원한 바람이 불고 도라지밭은 끝없이 파랗게 출렁였어요. , 이대로 돌아서기엔 너무 아까웠어요.
조그만 쉬었다 갈까?’
잠깐 앉아서 땀을 식혔어요.
그때 뭔가 하얀 것이 힐끗 지나갔어요. 벌떡 일어났죠.
도라지꽃이 사사삭 흔들리고 하얀 것이 공 구르듯 달려가고 있었어요.흰 여우였어요.
아주 작은 새끼여우였어요.

나는 총을 들고 쫓아갔어요.
그런데 너무 빨라 쫓아갈 수가 없었어요.
탕 하고 쏴 버리면 되지만 여우굴을 찾아내고 싶었거든요. 큰 여우를 잡고 싶었어요.
그런데 새끼여우는 좀 높은 둔덕을 올라가더니 갑자기 꽃 속으로 숨었어요. 사라져 버렸어요.

나는 멍청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죠.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요.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구나 생각했죠.

"어서 오세요.”
이상한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더니 작은 가게가 아니예요?
도라지 염색집
파란 글자로 씌어진 간판도 보이고요.
간판 밑에는 쪽빛 앞치마를 두른 점원 아이가 오도카니 서 있었어요. 나는 금방 알아챘죠.

아하, 아까 그 새끼여우가 둔갑했군.’
, 속은 체하고 이놈을 잡아 볼까 생각했죠.
모른 척하고
좀 쉬어 갈까?”
했더니, 아이로 둔갑한 여우는 생긋 웃으면서
그러세요.”
하고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가게 안은 마른 흙바닥이었어요. 자작나무로 만든 의자가 다섯 개 정도 있었고요. 좋은 테이블도 있었어요.
보기보다 가게 안이 깨끗한 걸.”
나는 의자에 앉아 모자를 벗었어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여우는 차를 공손히 쟁반에 들고 왔어요.
뭘 염색하지?”
나는 놀리듯이 물어 봤죠. 갑자기 여우는 벗어 놓은 모자를 들더니
아무거나 다 해요. 이런 모자도 파란색으로 물들일 수 있어요.”
?”
나는 깜짝 놀라 모자를 빼앗았어요.
난 파란 모잔 싫어.”
그러면…….”
여우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 머플러는요? 양말도 바지도 윗도리도 쉐타도 모두 파란색으로 물들일 수 있어요.”
나는 싫은 내색을 했어요. 이녀석이 무턱대고 아무거나 물들이려는구만 하고 생각했죠.
하긴 사람이라고 다르진 않겠지요. 뭔가 물들여 주고 돈을 받고 싶을 테니까요.
나는 손님이고 차까지 대접받고. 한 가지라도 염색을 하긴 해야겠는데.
그래서 손수건을 좀 물들여 달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어요.

그때 여우가 뚱딴지같이 커다란 소리를 지르지 뭐예요.
손가락을 물들여 드릴까요?”
, 손가락?”
나는 벌컥 화가 났어요.
여우는 생긋 웃으면서
물들여 보세요, 손님. 아주 멋져요.”
여우는 자기 손가락을 내 눈앞에 보여 줬어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만 파랬어요.
여우는 파란 네 손가락으로 네모난 창문을 만들어서 보여 줬어요.

그리고는 내 눈앞에 대고
여기 보세요, 여기 보세요.”
즐거운 놀이라도 하듯 말하는 거예요.
으으응…….”
난 좀 귀찮았어요.
좀 들여다보세요.”
난 마지못해 들여다보았죠.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손가락으로 만든 작은 창문 안에 하얀 여우 모습이 보였어요.
아름다운 엄마여우였어요. 꼬리를 우아하게 들고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창문 안에 여우 그림이 한 장 끼워져 있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여우는 뜬금없이
우리 엄마예요.”
…….”
오래 전에 총 맞아 돌아가셨어요.”
총에?”
, 총에요.”
여우는 살며시 손을 내리더니 웅크리고 앉았어요.
자신이 여우라는 걸 말해 버린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엄마를 만나보고 싶었어요.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어요. 누구라도 그렇겠죠.”
슬픈 이야기였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죠.
오늘 같은 가을날에 바람이 솨아아 하고 불더니 도라지꽃이 속삭였어요. 손가락을 물들이세요.
그리고 창문을 만드세요 하고요.

그래서 도라지꽃을 잔뜩 뜯어서 꽃으로 손가락을 물들였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여우는 양손을 펼쳐서 또 창문을 만들어 보여 주었어요.
나는 이제 쓸쓸하지 않아요. 이 창문만 있으면 언제든지 엄마를 볼 수 있으니까요.”
나는 너무 슬퍼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도 혼자 살거든요.
나도 저런 창문이 있었으면…….”
나는 아이같이 중얼거렸어요. 그랬더니 글쎄 여우는 너무 반가워하면서
그럼 빨리 물들여요. , 손을 펼치세요.”
하고 덤비는 거예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았어요. 여우는 꽃물이 들어 있는 접시와 붓을 갖고 왔어요.
그리고 붓에 흠뻑 꽃물을 묻혀 정성들여 물들이기 시작했어요.
조금 후에 내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은 파란 도라지꽃 색이 되었어요.

다 됐어요. 빨리 창문을 만들어 보세요.”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네모난 창문을 만들었어요. 약간 겁이 났어요.
눈에 갖다 댔어요. 내 작은 창문 안에는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쓴 여자 아이가요.
내가 좋아하던 여자아이였어요. 눈 밑에 점도 있고.

아니, 저 애가!”
어때요? 손가락을 물들이니 정말 굉장하죠?”
여우는 해맑게 웃었어요.
, 정말 굉장해!”
나는 돈을 내려고 주머니를 뒤졌어요. 그런데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돈을 안 가져왔구나. 물건이라도 줄게. 모자, 윗도리, 쉐타, 머플러 뭐라도 좋아.”
그렇다면 총을 주세요.”
총은 주기가 그런 걸 하고 망설였어요.
하지만 손가락 창문을 생각하자 총 정도는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 여기 있다.”
나는 기분 좋게 총을 여우에게 주었어요.
여우는 굽실 인사를 하고 총을 받았어요. 그러더니 버섯을 주었어요.
오늘밤 간식으로 드세요.”
버섯은 주머니에 잘 넣었죠.
나는 여우에게 돌아가는 길을 물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죠.
가게 뒤가 바로 삼나무숲이라는 거예요.
숲속을 삼백 미터쯤 걸어가면 오두막이 나올 거래요.

나는 여우에게 인사를 하고 들은 대로 가게 뒤로 돌아갔어요.
정말로 눈에 익은 삼나무숲이 있었어요.
햇살이 반짝반짝 나뭇잎 새로 들어와서 숲은 따뜻하고 조용했어요.

난 정말 놀랐어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지 못했던 길이 있었던 거죠.
멋진 도라지밭과 착한 여우…….

난 기분이 좋았어요. 콧노래를 부르면서 걸었어요. 걸으면서 창문을 만들었어요.
이번엔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안개비가요. 그리고 저 안쪽에 어슴푸레하게 앞마당이 보였어요.
그리운 우리 집 안마당이요. 앞마당이 보이는 안쪽에 툇마루가 있어요.
마루 밑에 긴 장화가 내던져진 채로 비를 맞고 있어요.

저건 내 건데.’
나는 금방 알았어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지금이라도 금방 긴 장화를 정리하려고 나올 것만 같았거든요.
몸빼를 입고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요.

얘야, 이렇게 내버려 두면 어떻게 하니?”
이런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어요. 앞마당에는 엄마가 가꾸는 채소밭이 있어요.
상추가 한 뭉텅이 비를 맞고 있어요.
저 상추를 뜯으러 엄마가 나오지 않을까?

집안은 좀 밝았어요. 불이 켜져 있었어요. 라디오 소리에 섞여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요.
저건 내 목소리, 또 저건 죽은 여동생 목소리…….

후우, 큰 한숨을 쉬면서 난 손을 내렸어요. 가슴이 아파서요.
내가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났거든요.
저 앞마당은 이젠 없어요.

어쨌든 난 멋진 손가락을 가진 거예요. 소중히 아껴야지 하면서 숲길을 걸었어요.
그런데 내가 오두막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세요?
글쎄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씻어 버린 거예요.
습관이거든요.

, 어쩌지?’ 생각했을 땐 벌써 늦어 버렸어요.
파란 도라지 꽃물은 물에 씻겨 지워져 버렸으니까요.
색이 빠져 버린 손가락으로 아무리 창문을 만들어도 오두막 천장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그날 밤 버섯을 먹을 생각은커녕 고개를 푹 수그리고 넋을 잃고 있었어요.
여우에게 한 번 더 물들여 달래야지.
다음날 여우에게 줄 샌드위치를 잔뜩 만들어 가지고 삼나무숲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삼나무숲은 가도가도 삼나무숲뿐이고, 도라지밭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그 뒤로도 몇 날을 산 속을 헤맸어요.
여우 우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리거나 숲속을 삭 하고 움직이는 하얀 그림자가 보이면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뒤졌어요.

하지만 한 번도 여우를 만날 수 없었어요.
가끔 손가락으로 창문을 만들어 봐요. 혹시 뭔가 보이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한 버릇이 있네 하고 웃곤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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